[다니엘의 환상]
지금부터 약 2,600년경 그 당시 지중해 연안의 문명사회의 패권을 장악했던 나라는 신 바벨론 제국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라크에 해당하는 나라다. 바벨탑을 건설하다가 사막 가운데 사라졌던 고대 바벨로니아 제국의 영화를 다시 회복하겠다고 등장한 나라이다. 제국을 건설하고 힘으로 주변 나라들을 다스리던 왕의 이름은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었다. 그의 통치 정책은 독특하여 인근 국가를 정복한 후 반드시 그 나라의 젊은 인재들을 포로로 사로잡아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 이름을 주고 궁중에서 고급 의복과 음식으로 대접하며 바벨론 식으로 교육했다. 그는 젊은 두뇌들(young brains)의 잠재력과 가치를 알고 있는 현명한 통치자였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이 아주 이상한 꿈을 꾼다. 그런데, 그 꿈으로 인하여 느부갓네살 왕은 번민에 빠지게 된다. 꿈에서 보았던 환상이 그로 하여금 심한 공포감에 빠지게 하였는지, 혹은 두려운 꿈을 꾸었으나 깨고 나니 도무지 그 내용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의 신하들에게 아주 엉뚱한 요구를 하게 된다. 나라에 있는 모든 점쟁이와 박사들을 다 불러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아맞히도록 하고, 그 꿈을 해석하라는 엄명을 내린 것이다. 꿈에 의해 신경이 곤두서고 난폭해진 왕은 만일 꿈 해석을 못할 시에는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때, 젊은 박사들 가운데 마침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 사로잡혀 온 다니엘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나서서 왕에게 하루의 여유를 간청한다. 그날 밤 다니엘은 왕이 보았던 그 꿈을 보게 되고, 더불어 그 내용에 대한 환상(vision)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왕 앞에 나서서 그 꿈을 해석하였던 것이다.
다니엘의 환상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은 거대한 신상(great image)이었다. 그런데, 그 신상은 신체 부위에 따라 재료(材料, materials)가 크게 다섯으로 나뉘어 있었다. 머리는 순금(fine gold)으로, 가슴과 팔들은 은(silver)으로 배와 넓적다리는 놋(bronze)으로, 종아리는 철(iron)로, 그리고 마지막 발과 발가락은 철과 흙(iron and clay)으로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왕이 그 신상의 위세에 놀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공중에서 큰 돌이 하나 떠오르더니 신상의 철과 흙으로 된 발을 내리치자, 신상 전체가 가루와 같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마치 타작마당의 겨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온 세계에는 우상을 친 돌이 태산을 이루며 가득 채워지게 된다. 이렇게 꿈은 끝을 맺는다.
다니엘은 그 신상의 장면을 해몽하며, 그 시대적 상황에서 장차 다가올 세상에 대한 예언을 한다. 현재, 순금의 영화를 누리고 있는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점차 그보다 못한 제국들이 나타나서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요, 마침내 철과 같이 단단한 나라가 나타나 무수한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의 이 예언을 두고 역사학자들이 일컬어 은의 제국은 바벨론 제국 후에 나타난 페르시아 제국이요, 놋의 나라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제패되었던 마케도니아 왕국이요, 철의 나라가 바로 로마 제국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철기 문명으로 세계를 제패하였던 로마 제국이 발흥하였던 이후로 어쩌면 세계 역사는 철로 상징되는 힘의 논리를 앞세우며 팩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팩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까지 이어지는 철기 시대의 흐름을 이어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재료공학(materials engineering)을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다니엘의 환상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재료로 구분되어 나타난 인류의 역사? 그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황금의 머리에서 시작하여 철과 흙의 발로 내려와 끝나는 역사..., 특별히, 금, 은, 구리, 철로 나타내진 금속의 순열은 매우 독특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이 순서는 외적으로는 금속이 점점 강해지는 순서이기도 하지만, 그 가치(value)는 점차 하락하는 순서로 나타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물질과 기계문명에 의해 세계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점점 더 강성해지고 단단해지지만, 그 내면의 정신적 가치는 점차 하락하고 있는 현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역사는 이같이 퇴보하여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철과 흙으로 된 발과 발가락은 무엇을 뜻하는가? 철과 흙으로 이루어진 발바닥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 부분을 상징한다면, 바야흐로 우리는 그곳을 향해 진입하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곳은 유독 철과 흙이 섞여 있어야만 하는가? 온 세계가 정보화 사회의 열기로 들끓고 IT산업의 벤처 창업 열풍이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요즈음, 어떤 시각으로 21세기 문명을 조망해야만 하는가?
이 글은 새 천년을 여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이 흥미로운 화두(話頭)를 풀기 위해 쓰였다.
[순금(Pure Gold) : 황금 머리]
역사는 진보하는가? 아니면 퇴보하는가? 이 논쟁은 진부하다. 그리고 끝이 없다. 그 이유는 역사 자체가 지닌 양면성에 있다. 인간이 경험하는 역사는 항상 과거의 실패와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양상을 띠며 끝없이 순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보는 시각에 따라 또는 처한 환경과 시대에 따라 때로는 퇴보하는 것처럼 더러는 진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의 어느 한 모퉁이 어느 한 순간에도 시대적 모순에서 완전히 벗어나 본 일이 없다. 전쟁과 기근, 끝없이 지속되는 자연 재해, 그리고 사회적 모순과 폭력, 독재와 압정에 시달리며 역사는 흘러왔다. 물질이 풍요해지면 반드시 도덕적 타락과 정신적 기근이 뒤따라왔다. 한 시대 속에서도 항상 구르는 눈덩이처럼 더 커지는 문제들을 직면하며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향수에 빠져드는 경향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를 회상해보면 그래도 지나온 날들이 더 좋았더라고 생각될 때가 많은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사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에 의하면 아주 아득한 옛날에는 성군에 의해 다스려지던 공평한 사회가 존재했었다는 기억들을 공유하고 있는 듯 하다. 성경에 나타나는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임금이 필요 없는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요순 시대가 중국에 있었고, 그리스 신화에도 최초의 황금의 시절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을 통칭하여 에덴의 추억이라고 부르자. 분명 오랜 옛날에 지상 낙원과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에덴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본능적 기대 욕구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현세의 불완전성이 사라지고 완전한 공의로 다스려지는 사회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것들을 개념화해 온 것이다. 그것이 더러는 종교적 신앙이나 내세적 민중 운동으로 분출되기도 하였고, 더러는 철학적 사유에 의해서 표현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민간 신앙의 형태로 퍼져갔던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이나 중국의 화서국(華胥國)․봉래도(蓬萊島), 인도의 희견성(喜見城), 도교의 상청옥경(上淸玉京), 불교의 안양정토(安養淨土)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그것을 현상계(現象界)의 불완전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민간 신앙이나 전설의 편린들은 태초의 완전성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잔류하고 있는 에덴으로 돌아가기를 희구하는 열망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분출되어온 단면들은 아닐지? 신상에서 나타난 <황금 머리>는 분명 현존의 세계가 태초의 완전성에서 크게 퇴보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역사는 역경과 시련을 극복해가며 끊임없이 진보해 가고 있다는 것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믿어오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신상으로 돌아가 보자. 순금(pure gold)으로 만들어진 머리... 그 의미는?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금은 값진 것, 귀한 것, 부요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하물며 순금은 가장 값진 것이며 또한 정결한 것을 나타낸다. 모름지기 머리는 온 몸을 이끌어 가는 사령탑이다. 그 속에서 모든 행동이 분출되어 나온다. 순금와 같이 순결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머리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행동으로 이끌어 갔을까? 황금 머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역사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에덴동산을 지구상에 실존하였던 그 어떤 곳으로 보든지... 아니면 피안(彼岸)의 세계를 그리기 위한 또 하나의 가상공간으로 보든지... 아무튼 좋다. 역사의 시작이 그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에덴동산에는 온통 순금과 같은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에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임에 분명하다. 그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뜻이다. 그 속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된 두 남녀에 의해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역사가 그렇게만 될 수 있었다면... 설사 에덴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간절한 바람일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 가상공간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가장 사람이 살기 좋게 설계된 자연 환경 속에서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왜 그들은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았을까? 아니, 왜 인간은 벌거벗으면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왜 인간만이 옷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일까? 모두 비슷한 질문이다.
부끄러움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그러하기에 옷은 도덕적으로 격하된 존재의 열등의식을 가리고자하는 도덕적 표현이다. 반대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은 두 사람의 완전한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에게는 가릴만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결국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도덕적으로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이 살고 있던 동산 중앙에는 특별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동산의 모든 실과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지만, 유독 그 나무의 열매만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선악과(善惡果)였다.
자... 선악과 이야기만큼,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나 혹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자(膾炙)되며 제각기 해석되고 더러는 공격을 당해온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논하기 위한 학문적 주제로서 일련의 통찰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분명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지닌 선과 악의 양면성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은유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지닌 선한 속성은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기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악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금수가 행하지 못하는 마귀적 행동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깡패 집단이 동료를 죽인 후, 토막을 내고 그의 내장을 파서 나누어 먹은 후 매장했다는 엽기적 뉴스를 접하고 인간의 악함에 새삼 놀라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 뿐인가? 지난 세기를 붉게 물들였던 수많은 전쟁과 수용소 군도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역사의 다큐멘터리들을 우리는 물증으로 가지고 있다. 마약과 매춘이 행해지는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매일 밤 벌어지고 있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행위들은 어떠한가?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한 점 부끄러운 얼룩도 없이 완전한 존재로 남아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 그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항거하여 비교적(?)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다가 옥사(獄死)한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는 그의 중요한 저서 <윤리학(Ethics)>에서 완전한 도덕의 기준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제시되는 어떤 기준도 완전성에 이를 수 없기에, 도덕의 기준은 완전한 신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즉,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 신이 원하는 것이 선이요, 그 신이 원치 않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선이요, 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이다.
선악과...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고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금석이었다. 선악과가 상큼한 사과이었는지 신 포도였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특별한 성분을 지닌 과일이어서 먹는 순간 신기한 반응이 일어나서 선악에 대해 무지했던 아담과 하와의 눈을 일깨움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한 것은 더욱 아니다.
완전한 신은 그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여 선악과의 화두(話頭)를 던진 것이다.
“동산 안에 있는 모든 실과는 자유로이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함의(含意)가 들어 있다. 첫째, 그는 신과의 완전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그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존재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 자체가 도덕적 요구에 어떻게 반응(response)하는가 하는 능력(ability)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도덕적 존재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신의 도덕적 요구조건을 지킬 수도 혹은 어길 수도 있는... 즉,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혹은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신의 뜻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들이 도덕적 완전성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즉,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완전한 도덕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신이 인간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순종의 삶이었다면, 황금 머리의 재료인 금이라는 금속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가장 잘 늘어나고 펴지는 금의 성질이 순종적 성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은 얇게 펴서 두께 0.00001cm의 금박(金箔)을 만들 수 있고, 1g의 금으로 약 3,000m의 금실을 뽑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금은 가장 순종적인 금속인 것이다.
선악과는 그 자체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과 악의 갈림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 갈림길에서 그들은 불순종의 길을 택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보다는 자신의 길, 인간의 길, 악마가 유혹하는 길..., 결국은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 순간..., 황금 머리는 하얗게 빛을 바랬다. 그리고, 신과의 완전했던 관계성은 깨지고 말았다. 그들은 완전성으로부터 도덕적으로 격하(degradation)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있던 찬란한 도덕적 투명성은 사라졌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은 밝아지고(?) 벌거벗은 육체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완전한 사랑 이야기도 끝이 나고 말았다. 모든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분리와 다툼과 책임전가와... 그리고, 죽음을 향한 긴 여로를 내딛게 된 것이다.
그렇게 불완전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은(Silver) : 가슴과 팔]
금(gold)..., 샛노란 황금..., “금속의 왕” 또는 “왕의 금속”이라고 불리던 이 물질..., 앞서서 우리는 금을 완전성의 상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속에서 금은 독특한 이중적 역할을 해왔다. 부요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황금에 눈 먼 인간들을 끝없는 파멸의 나락으로 빠뜨려온 유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모든 물질적 부요의 상징으로서 금송아지 또는 금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려 절하였던 고대인들에게 우상으로 화하여 종종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마이다스 왕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보면, 황금에 눈이 어두워 물신(物神)의 유혹에 빠져 헤매고 있는 황금만능주의의 세태는 고대나 현대나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은은 어떤 금속인가? 은 역시 금과 더불어 귀금속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높임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은은 금속의 물리적, 기계적 성질 면에서도 금과 비슷하여 부드럽고 전성(展性) 및 연성(延性)이 여전히 매우 크다. 타락한 인간도 처음에는 별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적이었고, 카인과 아벨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은의 열과 전기를 통하는 성질은 금보다도 더 좋은 면까지 가지고 있어서, 마치 하나님의 보호막을 떠난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더욱 열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발 빠르게 움직이게 된 것과도 같다.
그러나 은이 금과 완전히 다른 것이 있다. 그 광채와 화학적 성질이다. 은이 아무리 빛날지라도 금과 견주어보면 곧 광채를 잃어버린다. 찬란한 황금의 태양 빛 아래 싸늘하게 식어버린 달빛의 냉기를 느끼게 된다. 또한 금과 은은 본질적인 화학 조성이 다르기 때문에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그토록 다른 금속들을 배합하여 금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본질적으로 금은 금이고 은은 은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종교와 철학 윤리 사상으로 인간성의 회복을 꾀하고 이상국가와 철인 정치를 꿈꾸어 왔지만 실패하고 만 것처럼 연금술로는 금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금에서의 은으로의 격하는 인간의 내면적 본성과 관계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왔다. 특별히 가슴과 팔이 은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타락 이후의 인간은 이웃을 사랑의 가슴으로 바라보고 서로의 필요를 도와주던 관계가 변질되어, 오히려 타인을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묘사되고 있는 카인이 아벨을 죽이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결국 그가 자기 동생과의 비교의식 가운데 그의 가슴속에서 질투와 미움의 감정이 불같이 일어나면서 손을 들어 돌로 아벨을 처 죽인 것이다. 형제를 마음속에서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자라고 말한 예수의 말을 빌자면, 우리 모두의 손은 이미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는 살인자들인 셈이다.
즉, 금에서 은으로의 격하는, 비슷하면서 약간 덜 귀한 금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내면에서 생명의 본질을 잃어버린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살인자 카인의 후예들에 의해 펼쳐지는 문명사회의 비극들은 깨어진 신뢰 관계 속에서 극대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을 신뢰할 수 없어 울타리와 성벽을 쌓게 되었으며,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가상의 적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무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성경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카인의 4대 손인 최초의 대장장이 두발가인(Tubal-Cain)에 이르러 이미 동과 철을 가지고 각종 기계를 만들었다고 써 있다. 이들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곧바로 무기류를 제조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들 라멕(Lamech)은 자신을 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칠십 칠 배의 보복을 가하겠다는 오만한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가공할 핵무기를 서로 쌓아놓고 자신만의 안전을 주장하는 냉전 논리는 다름 아닌 현대판 라메키즘(Lamechism)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라멕은 두 아내를 둠으로써 중혼(polygamy)을 인류 사회에 들여온 장본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투명한 신뢰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던 에덴에서의 아름다운 가정은 깨어지고 말았다.
인간의 가치는 금(金)과 은(銀)에서 곧바로 동(銅)과 철(鐵)로 또 다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동(Brass/Bronze) : 배와 넓적다리]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두 가지 본능이 있다면 식욕과 성욕일 것이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명 속에 이미 죄의 씨앗들이 배태되어 있었다면 그것이 가장 원초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우상 숭배와 성적인 탐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서로 피 흘려 싸우며 투쟁하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자신에게 돌아올 떡덩이를 위해서 남을 해치는 일들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청동(Bronze)은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든 구리 합금으로 가장 오래 전부터 창칼이나 포신과 같은 무기류 뿐 아니라 청동상과 동화(銅貨)의 제조에 사용되어 왔다. 구리에 아연을 섞어 만드는 황동(Brass)은 놋쇠라고도 하며 청동(Bronze)과 함께 중요한 구리합금이다. 자연합금의 형태로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인류와 친근했으며, 비철금속 중 가장 일상생활과 관계가 깊다. 아연의 양이 많아짐에 따라 경도(硬度)와 강도가 증가하고, 합금의 색도 구리의 붉은 기가 도는 색에서 황색에 접근해 간다.
1836년 C. J. 톰센이 문화사의 발달 과정을 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로 분류함으로써, 인간이 사용한 이기(利器)의 재료에 따라 구분하는 고고학상의 3시기 법을 제창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청동기시대의 설정에 반대하는 학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주된 반대 이유는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의 정도가 높으면서도 원료, 특히 주석(朱錫)이 없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에는 들지 못했던 사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일반사의 분류 과정으로는 적절치 못하다는 점이다. 야금학(冶金學)적인 관점에 있어서도 지표면 상에 훨씬 널리 분포하는 철의 사용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인 발견에서 철기 유물의 연대가 뒤떨어지는 이유는 철이 가지고 있는 강한 부식성에 의해 유물이 쉽게 유실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청동기는 고대 국가의 여러 왕조에서 상류계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여러 장신구들의 제작에 사용되면서 금속 공예로 발전되어 왔다. 고대 오리엔트의 우르 왕조나 바벨론 왕조에서는 BC 3000년경부터 이미 청동 공예품들이 제작되어 왔으며, 그들의 종교적 정치적 통치 기구를 강화하기 위한 우상(偶像)의 제조에도 큰 몫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집트 왕조에서는 BC 2000년경 고대 제 12대 왕조에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주석의 수입 곤란으로 오히려 동기와 철기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도 은(殷)왕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은허(殷墟)에서 많은 청동 제기(祭器)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고대 근동 지방에 나타난 수많은 우상 중에서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빌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우상들로서 이집트의 바알(Baal) 신이나 그리스의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물신(物神) 숭배의 전형이다. 물질 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며 자신이 사들인 주식 시세에 자신의 모든 운명을 내걸고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하고 있는 현대인들을 생각하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숭배하며 그 신이 자신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기를 비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은 고대나 현대나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이들 신을 숭배하는 신전에서는 종교적 주술 의식과 함께, 여 사제들이나 미동 등에 의한 매춘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우상 숭배에 내 맡기는 일은 결국 몸을 더럽혀 섞는 육체의 간음 행위와 동일시 할 수 있는 영적 간음행위라고 엄하게 경고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결국 신상의 아랫배와 허벅지를 주석과 아연을 섞어 만든 청동으로 표현한 것은 인간이 매여 있는 가장 원초적인 죄의 결과인 탐심과 음욕을 향한 우상 숭배의 상징으로 파악될 수 있다.
[철(Iron) : 종아리]
철을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철기 문명을 앞세워 세계를 제패하였던 로마 제국 이후로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힘의 논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철기 시대를 지속해 왔던 것 같다. 힘과 무력의 상징이기도 한 철에 의해 냉혹한 국제 관계가 형성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종속 관계가 형성되었고, 그리고 그 힘의 평형이 다시 깨어질 때까지는 표면적인 평화(Pax) 시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 그 속에는 가혹한 압제 속에서 소리 없이 흐느끼는 피 지배 계층들의 분노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산업 혁명 이후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세계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의 영광도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근대사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철을 장악했던 행운의 역사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근대사에서 갑자기 서양이 동양을 제치고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 사실에 대하여 과학사가들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서구의 지성이 깨어나면서 과학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이 그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드는 데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정신적 가치만을 상부 구조로 인정하며 중시하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플라톤적 인식 틀이 무너지면서 비로소 노동 가치와 물질가치가 인정받게 되었고, 서구 사회는 과학혁명과 산업 혁명의 거센 물결을 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 혁명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던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 오히려 후발 주자였던 영국이 어째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유혈 혁명을 낳았던 프랑스에 비해 무혈 혁명으로 정치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 속에서, 하그리브스의 방적기계의 발명(1767)과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의 발명(1769)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다비(Darby) 부자(父子)에 의해 코크스를 사용한 근대적 의미의 용광로 제철법(1735)이 영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곧, 철의 대량 생산 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에 따른 최초의 철교(1779년), 최초의 수도망(1788), 최초의 철선(1818), 최초의 철도(1825)와 같은 연쇄적인 기술 발전의 촉발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영국은 철의 대량 생산을 통해 산업 사회를 이루기 위한 인프라스트럭처를 가장 먼저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에서 수탈한 원면을 가지고 방적기로 돌려 실을 뽑고 그것을 철도에 실어 운반하며 철교를 건너 쉽게 강을 넘나들고, 항구에서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선으로 다시 세계를 누비는 대영 제국의 산업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역사를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다니엘의 신상을 따라 내려가듯이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관점에서 살펴보는 방법이 있고, 역사의 흐름 속에 나타난 전체적 구조를 파악하여 그 관계성을 연구하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관점이 있다. 철의 역사를 공시적으로 이해하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대장장이 두발 가인이 철을 다듬기 시작한 곳을 고대 근동의 우르 지방으로 추정한다면, 그 이후로 철의 중심지는 끊임없이 서쪽을 향해 전진하며 세계를 한 바퀴 돌아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환상을 본 이후로 세계 선교의 역사가 끝없는 서진(西進)을 계속하며 이제 동아시아로 그 중심을 옮겨온 모습과도 일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아시아에서 유럽 대륙을 거쳐 영국으로 그리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또 다시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그리고 동해를 건너 한국으로 그리고 이제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British steel에서 미국의 US steel로 일본의 Nippon steel에서 한국의 포항제철(POSCO)로 철의 주도권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철을 주도하는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부상하여 세계 역사의 전면에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21세기 철강 생산의 주도국인 중국의 시대가 등장한 것이다. 결국 지난 2,000년 동안 세계 역사는 철의 강국을 중심으로 흘러온 힘의 역사였고, 그것이 인류의 표면적 물질문명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던 것이다.
산업 혁명 시기의 철은 각종 대형 공장 건설을 통하여 원자재를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골간(骨幹)을 제공 구축하게 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물질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대중이 맛보도록 하였으며, 물질적 풍요에 의한 이상 사회 건설의 환상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철강 산업과 더불어 함께 발전한 기계 공업은 인간을 육체노동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결과마저 가져왔다.
지금부터 꼭 100여년전....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인류 역사의 수레가 역동적으로 올라서던 시기에 서구 세계는 17세기 이후 자신들이 이룩해낸 과학기술의 혁명적 진보와 그에 따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학 혁명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게 되었고, 마침내 서구 지성인들의 자만심으로 표출되었다. 19세기 중엽 찰스 다윈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그와 같은 시대사조를 등에 없고 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유럽과 미국을 뒤덮는 사회학적인 혁명적 풍조가 되었고 진화 사상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서구 열강이 전 세계를 제국주의 식민지 영역으로 패권 쟁탈을 하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과정 속에서도, 양 진영 모두 과학 기술의 무한한 발전과 더불어 마침내 인류는 20세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신념만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주의는 현대성의 상징이었고 20세기를 여는 화두였다. 전 세계가 진보를 향한 활활 타오르는 열망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철 종아리로 무장된 인조 로봇은 진보 사상이라는 갑옷을 입고 제국주의의 깃발을 휘날리며 쿵쾅거리며 전 세계를 활보하였다.
그와 같은 신념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그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이룩해낸 과학기술의 열매가 핵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로 등장하면서 온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참상, 끝없이 이어지는 냉전 상황 속에서 서구의 지성은 자신들이 가졌던 진보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소위 탈현대,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적 논쟁이 일반 대중들의 삶 속에까지 파급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고 있었다.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진보 이념이 신앙 고백처럼 설파되고 있었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탈현대에 대한 외침은 곧 철골 구조 속에서 이룩해 내었던 거대한 기계문명에 대한 반발과 자성 그리고 2,0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철기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외침이기도 했다.
[철과 흙(Iron and Clay) : 발과 발가락]
뉴 밀레니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설렘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 속에서 마침내 21세기가 열렸다. 철의 시대가 지나가고, 바야흐로 새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과연 21세기 문명은 어떤 양상을 띠고 전개될 것인가?
20세기 후반부는 뉴 밀레니엄의 새 시대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탈현대의 조심스런 수군거림이 시작되던 무렵, 20세기 최대의 획기적 발명으로 여겨지는 반도체 트랜지스터가 출현으로 말미암아 산업 사회의 구조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인공두뇌의 첫 걸음을 떼게 한 위력적인 반도체 칩의 등장은 컴퓨터 산업을 비롯한 각종 전자 산업의 발달을 야기했으며, 20세기 후반부 선진국의 물질적 풍요를 극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물질 상품의 생산 공정을 자동화 공정으로 대치하여 대량 생산, 고속 생산 체제에 의한 거대 기업의 등장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한편, 컴퓨터와 자동화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노동 집약적 산업이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대치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새로운 국면은 엄청난 유휴 노동력의 사회적 형태 전환을 불러일으키게 된 점이다. 즉, 물질 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급격한 감소는 곧바로 서비스산업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들을 흡수하기 위한 사회 구조의 재편성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속화시킨 가장 큰 요인은 두말할 여지없이 반도체 집적 기술의 발달에 의한 정보 기술의 대량화, 밀집화, 고속화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반도체 칩의 위력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명을 통해 바벨탑 이후에 갈라졌던 세계의 민족과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VLSI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미 실리콘 반도체에 의한 정보 혁명이 예견되기 시작하였고, 21세기는 모든 사회 구조 속에 정보화의 씨앗이 배태되어 이루어진 정보화 사회 즉, 실리콘 쏘싸이어티(silicon society)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변화에 따라, 21세기에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로의 文明史的인 일대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는 엘빈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와 같은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유행처럼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지식정보 사회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환상으로 인해 산업 사회의 중요성과 기능이 전적으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려의 소리도 없지 않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산업사회의 인프라가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왔던 쇳물에 의해 구축되었다면, 지식정보사회의 인프라는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인터넷 정보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표 1 에 21세기 사회를 전망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산업 사회와 지식 정보 사회에 대한 특징들을 비교하였다. 산업 사회가 물질 상품을 대량 생산하기 위하여 대기업 주도하에 자동화 연속화를 추구하며 발전하여 왔다면, 앞으로 도래할 지식 정보사회에서는 주기적으로 탈바꿈하는 캐릭터/정보 서비스 상품을 중심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을 거듭하는 소기업 내지는 벤처기업이 주종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다. 두 사회의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가. 형태학적 특징/ 산업사회(대기업/대량생산/물질상품) vs. 정보사회(벤처기업/소량다품종/정보상품)
나. 경영 방식의 특징/ 산업사회(중앙집권형/일방향/하향식..) vs. 정보사회(분권형/쌍방향/개방적)
다. 사회적의사결정 인자의 영향/산업사회(정치경제중심/진보주의) vs. 정보사회(문화중심/생태,환경주의)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사회학적인 요인과 더불어 좀 더 근원적인 철학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중세 농경 사회로부터 근대 산업 사회로의 천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서구의 16-17 세기 과학 혁명에서 비롯된 세계관의 변화가 근원적인 동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가오는 21 세기 사회는, 뉴턴 역학과 칸트 철학에 기초한, 이성을 중시하고 결정론적 기계론적 우주관을 지니고 시작하였던 18- 20 세기의 서구적 합리주의적 사고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이다. 이는, 진보의 확신으로 출범하였던 20 세기가, 양자 역학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예견된 비 결정론적, 다원적 사고의 출현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며 침몰하였음을 의미한다. 첨예하게 부각된 산업 사회의 모순은 탈현대(Post-modernity)의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어 모든 사회 구조의 기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공학 기술 및 산업 형태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대두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결정인자가 생태/환경주의이다.
산업 사회는 과학 기술의 끝없는 발전과 더불어 전 인류가 이상적인 테크노피아(technopia)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보주의(porgressivism)적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 따라서, 물질문명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면 인간과 자연이 일시적인 피해를 입을지라도 국가적인 공리를 위하여 그것은 마땅히 감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보다 빠른 진보에 의하여 그와 같은 모순은 반드시 극복될 수 있는 한시적 상황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 세기도 지나기 전에 인간의 무절제한 자연 훼손과 환경 파괴 및 공해 산업이 미친 전 지구적 오염에 직면하여 20 세기의 낙관론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각국의 환경보호에 관한 경각심은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으며 조만간 그린라운드(Green Round)를 비롯한 국제 환경 기구의 허용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산업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전망이다.
환경 생태주의의 영향권 아래 산업사회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용광로는 21 세기 전반부에 어쩌면 역사 속에서 사라질 지도 모를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근대 기술 문명을 상징하던 공룡이 멸종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반드시 성장과 붕괴의 반복 과정 가운데 새로운 역사의 주역들을 탄생시키며 전개되어 왔다. 그 가운데, 서구의 근대 과학기술 문명만큼 물질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21 세기를 맞이하는 서구 사회는 근대 기계 문명의 기저를 형성하던 합리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며 다시금 문화의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진행된 지나친 유물주의의 역기능에 대한 반작용과 더불어, 산업구조의 개편에 따른 지식 정보 사회의 새 물결이 21 세기 서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 노동과 지식 상품만을 앞세우며 물질과 노동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면 구미의 선진국들은 21 세기 후반부에 새로운 암흑 시대를 맞이할 우려도 다분히 있다.
그리스 시대와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는 소위 당대의 지식 상품으로서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적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던 시대였지만, 결코 그 시대가 오래 가지 못하였고 사회적 풍요를 지속적으로 가져다주지도 못하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떡만으로 사는 존재는 아니지만 떡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가 동시에 추구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법칙인 것이다. 21 세기는 산업사회와 지식 정보 사회의 주도권을 동시에 장악하는 나라에 의해 결국 움직여갈 것이다. 정보화 사회를 상징하는 실리콘 반도체의 재료가 흙의 주성분인 규소라는 점..., 뿐만 아니라 새로이 부상하고 있는 광섬유 및 세라믹 재료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과연 21 세기의 신소재는 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철기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문명 시대로 진입하는 지금 철과 흙이 혼합된 신상의 발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21 세기는 그 동안 인류 역사가 축적해 오던 모든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만나서 혼재하며 열 개의 발가락처럼 다양한 복합 문명을 형성하는 혼합 구조형 시대가 되리라는 것이다. 천장부지로 치솟을 듯 하던 IT 산업의 벤처 창업 붐이 어느 정도 꺼져 가는 거품으로 가라앉음과 동시에 온라인(on line) 기업과 오프라인(off line) 기업들의 합병과 전략적 제휴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한 일이 아니다.최근 21 세기 전망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차이나 러쉬(China rush)에 대한 예측들이다.
그것은 철기 시대의 흐름을 타고 대영제국이 등장했던 것처럼 이제 시작되고 있는 <철과 흙>의 혼합시대의 파도를 중국이 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구미 각국의 선진국이 물질 상품을 위주로 생산하는 Hard Industry 의 경쟁력을 점차적으로 상실해 가며 캐릭터/정보/아이디어 상품을 위주로 하는 Soft Industry 에 의한 지식정보사회의 물결로 거세게 치닫고 있는 동안, 중국은 철강, 기계, 자동차 등 거대한 산업 사회의 유산을 자연스럽게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철강, 자동차 시장이 될 것이며 새로운 철기문명의 중심국가가 될 것이다. 한편, 중국은 1978 년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이래로 문화 혁명 시기에 침체되었던 과학기술 분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1986 년 3 월 <국가고신기술연구개발계획(일명 863 계획)>을 발표하여 정보 산업을 비롯한 첨단 7 개 분야를 중점 육성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21 세기의 중국은 산업사회와 지식정보사회가 혼재된 가운데 가장 큰 경쟁력과 가능성을 지닌 세계 최대의 시장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21 세기의 중국은 20 세기의 유산인 거대한 산업 사회의 적자 상속자가 될 뿐 아니라 정보 통신 분야에도 발 빠른 추격을 가해옴으로써 명실 공히 <철과 흙>이 뒤섞인 사회를 구축할 것으로 예상된다. 21 세기 들어 중국 정부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를 연상케하는 서부대개발(西部大開發)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13 억 인구가 실크로드를 타고 최첨단 인공지능형 자동차를 운전하며 21 세기의 새로운 서부개척시대를 열 날이 임박해 있는 것이다. 세계 선교의 서진(西進)의 역사를 따라 중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 국가로 부상할 것도 이미 충분히 예견된 사실이다. 신상의 발과 발가락이 표현해 주듯이 21 세기는 혼합의 시대(fusion society)이며 다원화 시대이다.
퓨전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젊은이들의 머리는 각종 색상으로 혼합되어 물들여지고 있다. 분리되어 있던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든 사상과 종교가 혼합되고 또 새롭게 나뉘어질 것이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신뢰하던 서구 철학의 한계성이 드러남과 더불어 동양의 기철학(氣哲學)으로의 새로운 회귀 현상이 일어나면서 理氣철학이 뒤섞이고 있다. 질서 정연한 결정론적인 과학만을 추구하던 서구 과학계는 지난 세기 불확정성의 원리 앞에서 한동안 갈등을 겪어 오던 중 마침내 카오스 현상과 복잡계 과학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서구 과학의 기저(基底)에 깊이 깔려있던 유클리드 기하학의 연역 추리적인 전제 속에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져 있던 자연 세계의 복잡성과 오묘함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드러나는 신비한 현상들은 극한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카오스(chaos)의 세계를 보여주며 우리를 새로운 혼돈으로 이끌어 가는 듯하다. 도대체 자기조직화 되어 있는 듯한 자연의 이 신비적 구조는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시간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따라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는 우주에 가득 찬 비가역성(非可逆性)... 과연 비가역성은 저절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21 세기는 새로운 국면에서 그리스 사상가들이 격론을 벌였던 본체론(ontology)적인 문제에 다시 한번 휩싸일 전망이다. 20 세기를 열었던 상대론과 양자론의 세계가 전혀 새로운 재료의 시대 즉 반도체 시대의 막을 열었던 것처럼, 복잡성의 과학에 의해 펼쳐지는 새로운 재료의 시대가 나타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뜨인 돌 : 종언]
Rolf Jensen 이라는 미래 학자는 21 세기가 정보화 사회를 넘어서 꿈의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산업화의 단계에서 인간의 육체노동(muscle)이 기계로 대치되었고, 정보화 단계에서 인간의 지력(brain)이 컴퓨터에 의해 대치됨으로 문명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면, 조만간 인간의 감성(emotion)이 시대의 전면에 떠올라 21 세기 과학기술과 접목되는 꿈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21 세기의 최대 시장은 감성의 상품화를 누가 먼저 이루어내는가 하는 데에서 결판이 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남들이 꾸지 못하는 꿈을 꾸며 한발 앞서가는 꿈꾸는 자들만이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는, 꿈의 벤처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정도 통찰력을 지닌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단순한 감성의 상품화를 통한 꿈의 세계를 논한다면 그것은 더욱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할 가능성이 있다. 멀티미디어와 가상현실들이 빚어내는 순기능보다는 전염병처럼 창궐하는 포르노 싸이트가 청소년들의 윤리 의식을 마비시키며 감각적인 말초신경만을 건드리는 각종 저질 문화 산업들이 기승을 부릴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해커와 예측 불가능한 정보대란의 공포 등 정보화 시대의 여러 가지 역기능이 빚어내는 어두운 그림자 뿐 아니라 생명공학이 창출해내는 인간 복제에 대한 논쟁은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과 개인의 정체성에 큰 혼란과 마비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기말 세기초에 예외 없이 나타나는 종말에 대한 예언들이 아닐지라도 현대 첨단 과학기술 문명이 가져다준 가공할 위력 앞에서 언제부턴가 인류는 종말에 관한 어두운 예감에 휩싸인 채 살아가게 되었다. 다니엘의 환상의 마지막 대목은 분명 우리에게 언젠가 인류 역사의 종말이 닥쳐올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공중에서 큰 돌이 하나 떠오르더니 신상의 발과 발가락을 내려치자 신상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다니엘이 보았던 신상의 환상(vision)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미래를 생각하며 비전을 논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21 세기는 더 이상 빵을 위해 사는 시대가 아니다. 21 세기는 꿈의 시대를 넘어 비전의 시대(the era of vision)가 될 것이다. 몽상을 넘어 시대를 읽는 분명한 비전을 지닌 비저너리들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21 세기의 주역이 될 동북아의 젊은이들이 비저너리가 되어 개척정신과 봉사정신으로 세계의 끝을 향해 뻗어가는 환상을 본다.
그러나 비전이라는 단어가 처음 유래된 성경에서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 비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생각해낸 미래에 대한 계획과 청사진이 아니라, 다니엘의 환상처럼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신적 계시(啓示)를 말한다. 비전은 하나님 안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그 비전을 깨달아 옳게 해석할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두려워할 것이다. 21 세기는 뜨인 돌의 비전을 바라보아야 할 시대이다.
재료공학사가 조망한 21세기 문명사 "철과 흙" by Lucas Z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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